2018/09/21 22:21

오 루시! 오 愛! 영화도 보고,

영화가 끝나고 한참 포스터를 들여다봤다. 
오-. 아-. 소리를 내며 존이 아닌 조완. 와쌉. 하던 루시가 생각났다. 은근히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그렇게 간지럽도록 부르는 것이, 그리고 그 부름은 그 무엇도 아닌 외로움에서 온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르기 전의 나인 것 같아서. 
외로움은 디폴트다. 
그건 누구에게나 그렇지 않나, 
라고 최근에 생각했지만 아닌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느껴지는 박탈감과 외로움이란, 루시같은 이를 
 마주할 때나 해소된다. 너무 잘난 세상 사람들 틈에서, 외로움이 병이라고들 하는 세상에서, 나만 외로운 것 같아 팔 양쪽이 으슬으슬해질 때 만난 당신. 
오늘을 넘기기 힘든 우리가, 내일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모든 사고 과정을 멈춰버리고, 잊혀지고, 지워지고 싶을 때, 사실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사랑과 희망에 가깝다고, 아냐, 사실 그런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뭐든 붙잡고 집착해보고 싶다고 솔직히 말해보고 싶을 때. 
그러나 그렇게 못할 때. 캘리포니아로 훌-쩍 떠나 이상을 찾아 도전과 모험을 맞이하고,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져 그 곳에서 위안을 만나는 루시를 바라보자.
씨발 나 바보 아니야. 외치며 큭큭 껄껄 웃으며 팔에다 愛자를 새기는 루시를 멋지다고 해주자. 
왜냐하면 나는 언젠가 루시였고, 루시 일 수 있으며
세상 누구라도 언제든 저렇게 할 수 있게 응원의 마음을 혼자 가져보자. 
어떻게든 외롭고 고단한 세상에서, 
내 방식대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러다 할 수 없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하루 쯤은 되어보자.

2018/03/27 12:20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길예르모 델 토로. 영화도 보고,


랑은 어디에나 네가 공기처럼 퍼져 있는 것과 같아서, 물의 모양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너와 나, 우리, 그러니까 사랑은 곧 형체 따위 없는 절대적인 것.
태어나 본 영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 주제를 가진 아름다운 영화.
서사 방식 조차도 아름다웠다. 남성 중심의 서사를 보란 듯이 깨부수는 영화였기 때문에! 일단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자기 인생 야무지게 잘 산다. 그러다 거대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감내해내며 누구보다 용감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라는 대사는 인생 내내 새기고 싶다. 어쩔 수 없다, 는 말은 정말 거짓말이다.) 자신과 자신의 사랑을 위해 나아간다. 그 어떤 연민도, 착취도, 어려움도 관객인 우리가 구태여 느낄 필요가 없다.
또, 정말 잘생기고 예쁘지 않더라도, 아니 하다 못해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은 존재들이라도 라라 랜드의 남녀 주인공처럼 서로 사랑한다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내가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히 실현해낸 영화를 봤다는 건 진짜 엄청난 기쁨이다. 나는 이렇게 못 만들 테니 관객으로라도 이런 기쁨을 느꼈다는 사실은 꼭 기록해 놔야 한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판타지, 동화라는 요소의 당위성을 위해 일부러 구체적인 시공간을 설정한다는데, 난 그 점이 소름 끼치게 너무 좋았다. 결핍이 있어야만 간절한 도피가 가능하니까. 폭력적인 시대와, 그에 딱 알맞게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차 있는 기득권 지배 계급에 맞서는 네 명의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말을 할 수 없거나, 성 소수자 이거나, 피부색이 다르거나, 국적이 다른 것.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말이다. 젤다의 말처럼 ‘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서로 ‘돕는다’는 그 행위들은 아직도 막 심장이 떨릴 정도로 너무 감동적이었다. 다시 한 번 써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다.” 나를 인간으로서 생각하지도 않는 존재들을 위해서는 먼지 한 톨도 치워줄 수 없으나, 나 자체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항공 우주센터의 괴생물체라도 꺼내올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을 가진 존재가 또 다른 방식으로 결핍을 가진 존재를 만나 서로에 대한 연민과 호기심으로 손을 맞잡고, 끌어안고, 일상을 나누고, 상대방이 전혀 상상도 못할 거라고 감히 확신할 만큼의 사랑을 느끼는 일.
너무 기적과 같은 일이다.

2018/02/13 23:15

짐 자무쉬의 패터슨, 에 사는 패터슨,의 이야기. 영화도 보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삶 속에서도 시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같은 시리얼, 같은 아침, 같은 사람, 같은 개, 같은 바에서, 어느 날은 너무 행복하고, 어느 날은 너무 불행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때 느끼는 감정들은 느끼는 순간에도 변화한다.
그 어떤 날도 반복될 수 없고, 같을 수 없다.

자꾸만 반복되는 삶에 약간의 권태를 느낄 때 즈음 보게 된 영화였다.
어쩌면, 이제 뭔가 조금은 새로운 감정이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나중에 돌아보아도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망가질 일은 절대 없겠다, 싶은 시기이기도 했다.
자꾸만 닫히는 자동문을 구태여 버튼을 마구 눌러가며 억지로 열어 두는 듯한 느낌으로다가. 언제든 그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반복이란 없고, 그 반복안에서 보잘것 없는 성냥도 화려한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다. 아주 오랜만에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여러 번 머릿속에서 굴려본 결과, 받아들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단어라고 생각이 됐다.
이건 오로지 패터슨, 그리고 짐 자무쉬 덕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좋은 영화이다.
호들갑 떨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호들갑을 떨 수 없었으며, 조용히 받아들이며 여러 번 다시 생각해보고 느껴보고 상기하기에 딱 좋은 영화이다.

애버렛을 보며 신현림 시인을 떠올리게 된 것도 덤으로 좋았다.
패터슨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몇 컷 지나지 않아도 조용하게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강렬했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희생, 엄청난 감정의 폭발, 대단한 사건이 없어도 소소한 일상들로 똘똘 뭉친, 내게는 정말 너무 소중한 걸작이다.

2017/12/29 14:07

감정 정리의 힘, 구제 고지 책도 읽고,

감정 정리를 도와주는 일곱 가지 테크닉 
1. 부정적인 감정의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1) 감정에 이름 붙이기 : "똑같이 부정적인 상황을 겪어도 서로 느끼는 감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 

최근 느낀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해 감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분명히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말하며,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만나고 있다" 고 정의 했던 사람이 나에게 현저하게 관심이 떨어졌다. 연락은 안하는 것은 물론, 변명만 가득 찬 상태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첫째, 서운하다. 그래서 가끔은 그 서운함 이 분노나 억울함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그 분노는 더 나은 상황을 가정하게 만든다.
왜 ~하지 않는가? 
왜 ~하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를 할 것인가? 
하는 식의 지금 해봤자 소용없는 분노 가득한 가정 말이다.
억울함 또한 그렇다. 
해봤자 쓸데없는 억울한 상상과 후회를 하게 된다. 

둘째, 섭섭하다. 섭섭해서 슬프고, 자신감이 떨어지며, 좌절했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내 탓을 하게 되고, 알 수도 없는 미래를 마음대로 속단하게 된다. 

셋째, 희망을 느낀다. 변명으로 자주 등장 하는 '바쁜 일'이 끝나면, 혹은 내가 좀 더 참고 기다리며 대화할 기회를 주면 괜찮아질 것만 같다. 희망고문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이런 희망도 좋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부정적인 결과가 또다시 나왔을 때, 내 마음이 다시 힘들어질 게 뻔한데 말이다. 

- 작품이 급히 끝나버렸다. 어찌 될 지는 모르겠으나, 영원히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굉장히 슬펐다. 팀원 그대로 다시 뭉치는 것은 당연히 안 될 일이니, 그 자체가 슬펐다. 이미 적응된 출퇴근 시간이나 당연하게 여겼던 여러 상황들이 모두 사라져버려서 슬펐다. 

2) 기분 전환 : "부정적인 연쇄 반응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에서 다른 대상으로 관심사를 바꾸는 일" 
-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운동' 
- 감상하거나 직접 연주하는 '음악'
- 요가나 명상, 산책 등 심신을 안정시키는 '호흡'
- 일기나 편지 등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필기' 

2. 현재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박혀있는 부정적인 '고정 관념'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이 외부가 아닌 바로 우리 내면에 있었을 경우. 
이 책에서는 이런 고정관념들은 강아지들로 가정한다. 그래서 -견 이라고 부르며, 마음이 불안해질때마다 '내 마음 속에 강아지 한 마리가 지금 짖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 강아지가 마음이나 인격의 일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런 성질을 가진 강아지 한 마리가 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1) 비판견 : 흑백논리에 따른 사고 - 분노, 불만, 부러움 
2) 정의견 : '꼭 이래야 한다'는 사고 - 혐오, 분개, 질투, 부러움
3) 패배견 : 자기비하적인 사고 - 비애, 우울감
4) 포기견 : 무기력한 사고 - 불안, 우울감, 무력감
5) 걱정견 : 불안해하는 사고 - 불안, 공포 
6) 사과견 : 자책하는 사고 - 죄책감, 수치심
7) 무관심견 : 회피하고 싶은 사고 - 피로감 
 
이러한 강아지들을 대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추방하기. 고정 관념 강아지가 짖고 있는 내용이 비현실적이며 아무 증거도 없는 경우.
둘째, 수용하기. 고정 관념 강아지가 짖고 있는 내용이 이치에 맞으며 증거도 있는 경우.
셋째, 길들이기. 고정 관념 강아지가 짖고 있는 내용이 100퍼센트 틀린 것은 아니며 앞으로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3. '자기 효능감'을 높인다. : 다소 무리하게 느껴지는 일을 마주해도 나라면 반드시 이 장벽을 뛰어넘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신념이나 기대. 
여기서부터 조금 거부감이 들기 시작한다. 반드시 무언가를 해내거나 도달하거나 넘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소중한 어떤 것을 취하는 것은 좋지만 그 취함에 당위성을 부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를 계속 응원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니,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4. 자신만의 '강점'을 살린다. 




2017/12/25 18:38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 도쿄대에서 우에노 지즈코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다, 하루카 요코 지음 책도 읽고,

올 초, 페미니즘에 관해 입문서들을 몇 개 읽기로 결심했었다.
즐겨찾던 책방 이음에서 입이트이는페미니즘을 예약 구매하러 갔다가 불행하게도 구매에 실패하여 이 책을 구입했다.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애초에 어떤 잘못된 일을 맞닥뜨렸을 때, 왜 잘못됐는지 나 스스로라도 혹은 연대할 수 있는 다른 이들과도 당당하게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시작했던 공부였는데 그 공부 방법부터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었는데, 굉장히 좋았다.

다음은 인상깊던 구절이다.

P.26
논쟁은 유치한 애들 싸움으로 바뀌고, 원래 논의하던 주제는 자취를 감춘다. 여성의 용모를 빌미삼는 식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구도를 피하려면 순식간에 제압해야만 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숱한 경험들이 떠올랐다. 나의 논의 혹은 다른 이들의 논의를 발화자의 외모로 덮어버리는 것. "머리가 짧아서, 외모가 부족해서, 혹은 갖가지 외모에 관한 컴플렉스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 아닙니까? 소위 꼴페미, 페미만세하며 현실 도피하는 것 아닙니까? 남자친구 못 사귀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유치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냐고 분노하기엔 너무 자주 마주하는 질문이라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은, 늦은 밤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스무살 어린 여자아이들 얼굴에 만원짜리를 흔들어가며 술을 마시자고 하던 남학우들에게 정당하게 분노하던 나의 얼굴에 대고, "넌 못생겼으니까 닥쳐."라고 말하던 너. 너도 생각이 난다. 얼굴 똑바로 들고 살고 있으려나.

P. 37
"원조교제를 두고 돈 때문에 몸을 팔면 몸이 더러워진다고 말하는 사람..."
"더러워지면 전으로 못 돌아간, 어떻게 해야 깨끗해지나, 한 번 더러워지면 평생 더러운 건가, 만약 그렇다면 차별해도 되나."

우리가 생각하는 "더러움"과 "깨끗함", 혹은 "순결함"은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순백의 피해자 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성범죄 피해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웃는 것도, 새로운 애인을 사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들.

P. 39
"내 앞에서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내면 보다시피 내 이해력은 급격히 떨어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게 정말... 무서워요."

P. 42
'밥 줘. 목욕물은? 잘게.' 이 세가지 말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자신과 타자의 관계성을 질문할 때는 어휘가 하나라도 더 많은 편이 좋다.

P. 53
본능. 모든 여성의 항의가 이 한 단어 밑에 깔리고 이용당했다. 미시적 : 가정, 거시적 : 국가. 고마샤쿠 기미가 쓴 마녀의 심판에 의하면, '본능'만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말은 없다. 본능이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다는 암시를 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성 본능. 여성의 등에 벗어날 수 없는 딱지를 붙이고, '여자의 숙명'이니 감수하라고 강요한다. 그렇다면 자녀 살해 사건은?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듯 어머니도 죽인다.

나는 수많은 회식자리에서,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세상 어느 곳에서든, 본능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고로 남자란, 남자의 본능이란, 본능이란 건 어쩔 수 없죠 등.
그러면서 잠재적 성범죄자 라는 말은 기어코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이란.

P. 66
보편적 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지였는가? 그 '진리'라는 이름으로 누가 배제되고 무엇이 억압됐는가? 이런 질문에 페미니즘만큼 근본적으로 답하려고 하는 입장은 없다. <나의 메타사회학>에 의하면, 나는 학문이 자연 발생적이고 결정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P. 88 
"페미니즘은 뭐든 그런 방정식을 내놓는다." "페미니즘으로 교활한 장사를 하지 마라." 이쯤되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 상대방은 처음부터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제대로 논의하려 들지 않는다. 언어를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갖춰지지 않은 언론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P. 118
"여자는 일에 소극적인 것 같습니다." "그 말 그대로다. 그래서 뭐가 나쁘다는 거냐?"
왜 그럴까요? 대강 푼돈이나 쥐여주고 공헌한 만큼 보상은 하지 않는 기업에 자기 인생의 백프로, 심지어는 백이십프로를 팔아넘기는 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 자기 사생활, 가정생활과 균형을 고려해서 애초부터 일에 소극적인 겁니다.
이를 '정상' 이라고 합니다.

P.128
그렇다면 나도 일을 하자.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외치며 혼자 일을 계속 하자. 우리는 앎과 언설이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현실을 산다.

P.141-144
하지만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평범하고 괜찮아 보이는 청년일수록 평범한 상식과 고정관념에 단단히 매여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평범한 것들이 내 삶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를.
"그렇다면 생활비 부담 비율을 7대 3이라고 한다고 하죠. 그런데 이건 노동의 시장 가격에 따른 비율입니다. 지불되지 않는 노동, 즉 가사 부담 비율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생활비를 더 내는 만큼 제 몫의 가사 부담도 줄었으면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노동은 가격인가요? 노동의 강도는 어떨까요? 대학 교수는 일터에 매여있는 시간에 비해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매여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지만 가격이 낮지요. 부부를 여기에 비유한다면 어느 쪽의 노동이 상위인가요?"
시장화된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누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 노동을 말할 수 없다.

P.175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그것들과 차별화하면서 자기만의 것이 탄생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다움을 얻을 수 없어요.

이것이 바로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였다.
너무 답답해서, 나만의 언어를 구축하려 시작한 공부였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초심을 많이 돌아본 것 같다. 더 많이 공부하고, 나만의 감성으로 나만의 페미니즘을 구축하는 것.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살아가는 것.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P. 181
자신이 느끼는 '위화감'이라는 현실인식을 기점으로 삼고, 사회를 조망하며 '의심'을 확장하고, 자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 중 어느 것을 길잡이로 삼을지는 '직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과정에 존재하는 것은 '감성'뿐이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기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느끼는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페미니즘이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감성은 하나로 좁힐 수 없다. 직감과 학문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만큼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는 것이 다양하다.

= 감성의 수만큼 존재하는 페미니즘.
마치 페미니즘이 수학공식이라도 되는 양, 나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대로 옮겨 얼굴에 복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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